[교회사(한국)] 교회사(한국) 2. 하멜과 표류기

관리자 승인 2018-02-10

하멜

 

통역관 벨테브레가 자기 동족임을 아는 순간 부여잡고 울던 하멜의 탈출과 표류기


하멜 일행의 제주도 상륙

 

 

벨테브레(박연)가 조선에 정착하여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을 때 자신과 같은 동족인 네덜란드인 하멜을 만나게 된다.

 

1653년(효종 4년) 7월 30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하멜 일행은 교역을 위해 스패로우 호오크 선을 타고 대만을 출발하여 일본의 나가사키 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배는 곧 태풍을 만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다 8월 15일 제주도 남해 앞바다에서 침몰했고, 64명 중 겨우 36명만이 뭍으로 올라왔다.

 

주민의 보고로 하멜 일행을 생포한 제주 현감은 역관을 불러 사정을 알아보려고 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난파된 배에서 물건들을 건져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어서 식료품, 의료용품, 적포도주, 서적, 천리경, 조총, 망원경 등을 다량 건져 올리게 하였다.

 

8월 21일 제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제주목사 이원진 앞에서 심문을 받은 하멜 일행은 ‘자신들은 화란 사람으로 일본으로 가려다가 사고를 당했으니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했으나 ‘국왕의 지시에 따르겠다’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다행히 서울에서 회답이 올 때까지 제주목사의 호의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두 달이 지난 10월 29일, 조정에서 문정관과 역관 벨테브레가 제주에 도착했다. 문정관의 문정에 침묵하던 벨테브레가 하멜 일행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며 누구인지’를 화란어로 물었다. 이미 자신의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린 벨테브레였지만, 하멜 일행이 자기와 같은 네덜란드 사람임을 아는 순간 서로를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하멜 일행은 적이 안심이 되었으나 이내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벨테브레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통역관의 권한이 아니었다. 벨테브레는 사실대로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는 외국인이 들어오면 돌려 보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들이 가려고 하는 일본도 안전하지 못하다. 일본 역시 외국인과의 교역은 바다 선상에서만 허용해 주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인 경우에는 그것조차 금하고 있다. 전에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대마도로 보냈는데 다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니 나와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 훈련도감에서 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멜 일행은 일본으로 가고 싶었지만 벨테브레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하멜 일행의 국내 활동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누리던 하멜 일행에게 어려움이 찾아 왔다. 그동안 각종 편의를 제공하던 이원진 제주목사의 임기가 만료돼 새 목사가 부임한 것이다. 새 제주목사는 하멜 일행에게 가혹한 대우를 하였고, 일행 중 6명이 고초를 견디다 못해 도망치려다가 발각되었다. 이는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였으나 벨테브레의 도움으로 곤장 25대씩을 맞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1654년 5월 하멜 일행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효종대왕을 상면하였다.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일행은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으나 효종대왕은 “입국한 외국인을 다시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조선의 법도와 풍속이 아니니, 여생을 이 땅에서 마치도록 결심하라. 그러면 모든 필수품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해 줄 뿐이었다.

 

총포에 능숙한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대장 이완 휘하에서 벨테브레의 지도아래 군인생활을 시작했다. 서양과학에 기초한 군사기술을 이국땅에서 활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전 세계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는 해양기술 또한 가장 우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학문명이 벨테브레와 하멜 일행을 통해 조선에 접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들을 통하여 서양의 앞선 문화나 종교를 수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멜 일행이 벨테브레와 다른 점은 늘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어 조선생활에 적응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틈만 나면 자기들의 언어로 탈출 방법을 모의하면서 결의를 다졌다.

1655년 3월 드디어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 왔다. 청국의 사신이 한양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당시 청나라는 수시로 조선에 사신을 보내 내정을 간섭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오해받을 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외국인들이 공식적인 절차 없이 뜻하지 않게 국내에 들어온 경우에도 청에 연락해 청의 지시에 따르거나 아예 송환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므로 벨테브레와 하멜 일행처럼 청에 알리지 않은 경우에는 ‘조선이 청을 배제한 채 네덜란드와 외교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청의 사신이 귀국하는 날, 하멜 일행 중 헨드릭 얀스와 헨드릭 얀스 보스 두 사람은 나무를 하러간다고 속이고 홍제교 밑에 잠복해 있다가 지나가는 청나라 사신 일행 앞에 갑자기 뛰어들었다. 그들은 사신이 탄 말고삐를 잡고 화란식 의복을 보여주며 구원을 요청하여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깜짝 놀란 사신은 그들을 도상 숙소인 고양까지 데리고 간 후 벨테브레를 불러들여 저간 사정을 들었다.

 

벨테브레는 급히 효종대왕에게 권하여 어전회의를 열게 하고, ‘사신에게 예물을 많이 주어 이 사실이 청나라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벨테브레의 말대로 은 3천이 청나라 사신에게 건네졌고,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던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멜 일행 중 조정의 명령을 어긴 두 사람은 투옥되었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하멜 일행은 두 번의 탈출시도를 통해 조정에 나쁜 인상을 심어주었다. 조정에서는 후환과 외교 마찰을 우려해 이들을 본국 네덜란드나 행선지인 일본으로 보내지 못하고 이들의 처리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1657년 3월 벨테브레는 하멜 일행과 한강변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조정에서 하멜 일행 전원을 전라도 작천 병영으로 유배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벨테브레는 이미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1남1녀를 둔 상태였지만, 본국인들과의 이별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유배생활이 얼마나 혹독하게 다가올 것인지, 또 탈출하려다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벨테브레로서는 하멜 일행을 조선에 적응시키려고 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그 아쉬움이 매우 컸을 것이다.

 

 

하멜 일행의 유배생활과 탈출

 

 

하멜 일행 33명은 1657년부터 전라남도 작천 병영에서 비참한 유배생활을 했다. 때때로 선한 관리를 만나면 ‘편리한 생활과 외출의 자유’도 누렸지만, 악한 관리의 학대와 흉년으로 인한 기근이 이들을 한없이 괴롭혔다. 특히 1661년부터 3년간 지속된 한발로 전라도 일대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이가 속출하였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기아와 싸우며 혹독한 학대를 견뎌야 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유배생활 7년 만에 11명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여실히 말해 준다.

 

식량난이 극에 달하자 조정은 하멜 일행을 여수 좌수영에 12인, 순천에 5인, 남원에 5인 등 세 곳으로 분산 배치하였다. 한 고장에서 이들의 배급을 다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63년 여수 좌수영에 배치된 하멜을 비롯한 12명은 바닷가로 보내진 것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탈출을 준비했다. 1664년부터 3년 동안 온갖 노력을 기울여 돈을 모아 ‘이웃 섬에서 목면을 사온다’는 핑계를 대고 작은 배 하나를 구입했다. 마침내 1666년 9월 4일 여수 좌수영에 유배되어 있던 12명 중 하멜을 포함한 5명과 다른 곳에서 방문 온 2명, 그리고 조선인 뱃사공 1명은 일본 이쓰시마(五島)를 향해 힘껏 노를 저었다.

 

무사히 이쓰시마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일본 관리를 만나 자신들이 화란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나가사키에 있는 화란상관(和蘭商館)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1666년 9월 14일 조선에 입국한 지 13년 만에 그곳 화란인 상관장(商館長)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외교적인 절차가 늦어져 다시 2년이 지난 후인 1668년 7월 20일에야 고국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약간의 풍랑을 만난 후 배가 1668년 7월 20일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살아 돌아온 우리는 13년 28일에 걸친 긴 포로생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아울러 뒤에 떨어져 있는 우리의 불쌍한 동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절히 간구했다.”

 

기나긴 여행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다. 사실 하멜과 그 일행은 조선에서의 13년을 신앙으로 버티고 미래를 소망했다. 처음 제주 앞바다에 파선했을 때도 선장은 “동료들이여! 하나님께 맡깁시다. 이와 같은 거센 파도가 한두 번 더 덮치면 우리 모두는 죽을 것입니다.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소”라고 외쳤다. 제주목사 이원진의 호의와 친절에 대해서는 “우리는 예수교 신자들로부터 받는 대우보다 이 이교도들로부터 더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제주도를 찾아 온 벨테브레를 만났을 때는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정성껏 앞으로 갈 길에 대하여 애원할 뿐이다”고 말했고, 여수를 탈출할 때는 “하나님을 정성껏 불러 도와주기를 비는 동시에 자신들의 신앙을 하나님께 맡겼다”고 기술했다. 하멜 일행은 벨테브레처럼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분명히 밝혔다고 효종실록과 연경제전집, 아정유고 등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하멜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을 때 조선에는 아직도 15명의 화란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1) 일본의 대마도주는 조선조정에 나머지 화란인 생존자들도 송환해 줄 것을 요청했고, 조선은 현종 9년 1668년 4월 12일 8명의 생존자를 대마도로 송치하여 곧 고국 화란으로 귀환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에 입국한 36명 가운데 16명이 자신들의 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그가 속한 동인도 회사에 조선에서 감금당했던 기간 동안의 임금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믿어주지 않았고 더군다나 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멜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조선에서의 생활을 토대로 표류기를 출간했다. 조선의 물정과 조선인의 기질, 풍습, 군사, 법속, 정치, 종교, 사회관습을 망라한 이 책은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유럽에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선교 후보생들에게 매우 유용한 조선입문서가 되었다. 1832년 칼 귀츨라프의 서해안 선교와 1865년 토마스 목사의 조선선교는 모두 하멜의 표류기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역사로 진행된 것이다.

 


           1) 일본의 외교문서 선린통서 제1권 “아란타표인사고”의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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