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쉽게 읽는 기독교강요 5-3

관리자 승인 2019-05-13

5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주 창조와 그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편집
: 이상호 목사(본지 발행인)
 

 

 

 

         10.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 불경건한 사람으로부터 해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며 비난으로 상처받는 반면에 악한 자는 번영과 부요 속에서 안정을 누리며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 밖의 또 다른 세상에서는 불의가 벌을 받게 되고 의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만일 현재의 모든 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형벌이 가해진다면 최후 심판 날까지 남아 있을 것은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만일 지금의 어떠한 죄에 대하여 전혀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체 사역과 각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실제로 표현하고 계시고, 이로써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되고 참된 행복으로 유인된다.

물론 하나님의 권능의 목적이나 가치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보이신 방법과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의와 선과 자비를 겸손하게 깊이 생각할 때에만 알 수 있다.

 

 

11. 창조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 있지만 어리석은 우리에 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그 자신과 하나님 나라를 명백히 보여주시지만 어리석은 우리들은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광대한 우주의 아름다운 구조와 질서를 보고도 마음을 기울여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하고, 자연의 통상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하여서도 하나님 섭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무분별한 운명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데는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하다.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신중했던 플라톤조차도 자신이 생각해 낸 둥근 구체(球體)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사람들에게 길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감당했던 지도적인 인물들도 이렇게 방황했거늘 하물며 미련한 우리들이야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섭리를 명백히 보여주는 인간사의 통치를 보고도 만사가 운명의 의지에 의하여 혼란에 빠진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을 소유하고 있다. 자신의 경솔하고 천박함에 무지와 어두움이 결합되어 자신을 위해 우상과 환상을 날조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 극단적인 방종으로 흘러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고안해 낸다.

이성과 교양으로 하늘나라를 통찰하려고 애쓰는 철학자들까지도 이런 수치스러운 일에 동참하고 있다.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학문과 예술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각자 자기 의견에 아름다운 치장을 하여 위장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가 다 허무맹랑한 그림자일 뿐이다.

 

이와 같이 ()에 대해 극히 혼란스러운 다양성은 마침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념을 버리도록 만든다. 즉 사람들은 현명하다고 하는 자들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을 어리석은 가르침 때문이라고 보고,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탐구하기 위해 괴롭게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결코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폭군 히에로가 시모니데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희미해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명료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다만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13.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 행위를 거절하신다

 

그러므로 순수한 종교를 부패하게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마음에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지만, 하나님 대신 마귀를 두는 자는 어떤 이유에서건 모두 다 배교자라고 성령께서는 선언하신다(고전 10:20 참조).

이런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에서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도 없이지내던 자였다고 말한다(2:12-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사마리아인들이 참된 경건에 거의 접근한 듯이 보였어도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예배 형식을 속된 것으로 여긴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인간의 방법으로 얻어진 의견은 비록 그것이 막대한 오류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오류의 산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은 비록 나쁜 결과를 수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가벼운 죄는 아니다(17:2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증거하시는 일들을 따라야 한다.

 

 

14.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에게 아무 것도 말해 주지 못 한다

 

그러므로 온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를 비춰주고 있지만 헛될 뿐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바로 그 구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11:3)”라는 말씀을 첨가하였다. 보이지 않는 신성(神性)이 온 우주 만물에 나타나 있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어야만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세계 창조에서 명백히 보여 졌다고 할지라도(1:19)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변명할 수 없게 만들 뿐, 인간의 통찰력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15.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그 둔감의 죄는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변명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양심이 나태와 배은망덕을 항상 깨우쳐주지 못하더라도 무지(無知)를 구실 삼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줄지라도, 우리가 방황자요 방랑자로서 길을 잃고 헤맨다면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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