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박원규 목사 로마서 설교(21)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롬 6:1-14)

관리자 승인 2019-12-25

            

 

 

사도 바울의 깊은 사상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 점이 없지 않다. 그중에서도 (5: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신 말씀이 더욱 그렇다. 만약 누군가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는다면, 은혜를 풍성히 받기 위해 죄를 많이 짓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다. 바울도 이 말씀을 하면서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악용할까 염려하여 자신이 한 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을 이해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라고 오해의 소지를 강하게 부정해 놓고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를 돕도록 (7:36-50)의 말씀을 살펴보자.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그런데 채주는 이 두 사람이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음을 알고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채주를 사랑하겠는가? 그 대답은 어렵지 않다. 당연히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채주를 더 사랑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 곧 큰 죄를 지었다. 그런데 그 죄를 탕감 받은 우리 모두가 다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죄 사함 받은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해서 옥합을 바친 여인처럼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아무 빚도 지지 않은 사람처럼 뻔뻔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들 중에서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할까? 당연히 자신의 죄가 큰 것으로 깨닫는 사람이 그 큰 죄를 탕감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더 사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은 죄를 많이 짓는 자가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옥합을 바친 여인처럼 자신이 큰 죄인임을 아는 자가 그 마음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자신의 말을 설명하면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 받은 자들로서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 것을 적극적으로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1. 세례는 곧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고전 10:2)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증거 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넌 사건이 바로 세례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그러면 이 홍해 사건이 왜 세례인가?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한 애굽의 군대는 물이 덮쳐 모두 죽었는데,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노예상태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노예 된 상태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2)”라고 반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 된 우리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례는 단순히 어떤 과정이나 의식이 아니고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죄의 몸이 멸하여진 우리는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아야 한다(6:6).

 

2. 세례는 또한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했다. 죄의 몸이 멸하여진 우리도 죄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이 있으며 이 새 생명은 우리 속에서 계속 자라고 있다. 이 성화의 과정은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3-15)”는 말씀처럼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 생활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그 영이 자라지 못하고 부끄러운 상태에 머물게 된다. , 육신은 영의 성장을 위한 도구여야 하는데 오히려 영이 육신을 위한 도구가 된다면, 그는 새 생명의 빛을 잃고 어둠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4)”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겨야 한다(6:11).

 

3.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 죄의 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리고 이미 심겨진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고 말씀 하신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성자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차로 변화되고 성화에 이르러야 할 것임을 명심하자. 자라는 영은 성화에 이르고 자라지 않는 영은 죽은 것임을 드러낼 것이다.

 

(맺음) 우리는 이신득의 곧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행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은 스스로 속고, 실속 없는 형식만 붙잡고 불안한 삶을 살게 된다. 이제 우리는 죄의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새 생명이 자라는 자들답게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자. 날마다 말씀과 기도, 감사와 찬양, 전도와 봉사로서 새 생명 가운데 열매 맺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자.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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