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사람의 수고

관리자 승인 2018-03-06

사람의 수고

     (전 6:7-12)
                                                                                                                  
  오늘 금요심야기도회에 나오신 성도님들 환영합니다. 일주일 내내 학교와 직장에서 수고하시다가 편하게 쉼을 시작하는 시간이 바로 지금인데, 또다시 기도하러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쉼이 시작하는 금요일 저녁시간대’를 좋아합니다. 그것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고’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직장 생활 자체가 만만치 않아요. 아무리 전업주부들이 힘들다 해도 직장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며 일하는 남편만큼이야 하겠습니까? 가사 일은 직장생활의 수고에 비하면 1/3도 안돼요.

물론 요즘은 여성들도 대부분 직장생활을 합니다만, 부부 중에서 ‘누가 주된 직장생활을 하는 가’에 따라서 그 스트레스 강도가 다릅니다. 파트타임 식으로 일하는 사람은 그 심적인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내가 그만 둬도 남편이 있으니까, 아내가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압박감을 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된 직장생활을 하는 배우자는 그 직장이 생명 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전심전력하게 됩니다.

‘내가 아니면 내 가족이 살아갈 수 없다, 내가 아니면 내 가족의 입에 풀칠할 수 없다’, 그런 마음으로 일하고 또 수고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수고’는 가장 기본적으로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기본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헛된 것’을 열거하고 있는데,

 

첫째가 사람의 수고입니다.

사람의 식욕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7절)”고 증거하는 바와 같이 사람의 식욕은 채울 수 없어요.

제가 한 번은 ‘사람의 식욕’에 대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배가 잔뜩 부른 사람에게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또 갖다 주는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그랬더니 위장에 가득 찼던 음식물이 금방 밑으로 착 가라앉으며 위장 안의 윗부분에 다시 빈 공간이 생겼습니다. 요즘 과학과 의학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런 모습의 초음파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위장에 빈 공간이 생긴 사람은 다시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식욕은 만족할 줄을 몰라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식욕은 단순히 그런 식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에 대한 식욕, 명예에 대한 식욕, 권력에 대한 식욕, 우리 인간들이 만족할 줄 모르는 식욕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재물에 대한 식욕이 가장 크겠지요. 아무리 많은 재물을 모아도 더 모으고 싶은 식욕이 우리 인간 누구에게나 있어요. 그래서 대대손손 쓸 것이 충분한 재벌들도 돈 때문에 가족들끼리 서로 싸우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으니, 그리 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전도서 기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10절 말씀에 보면 ‘사람이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식욕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질서와 명령에 결코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나, 자기보다 강한 하나님과 다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자기 식욕대로 사는 일은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재물은 우리가 먹는 음식처럼 인간이 존재하는데 꼭 필요합니다만 존재 목적 이외에는 더 이상 쓸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우리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재물이 많다고 해서 그것을 더 오랫동안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고, 더 맛난 것 먹는 것도 아닙니다. 뷔페 가서 갈비 뜯는 것이 더 맛납니까? 집에서 찬밥에 뜨거운 물 부어서 김치하고 먹는 것이 더 맛납니까? 뷔페가 일반화 된 요즈음 오히려 뷔페 음식이 질리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뷔페 음식이 몸에 더 이로운 것도 아닙니다. 비싸기 때문에 본전 생각나서 퍼 먹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식욕을 위한 사람의 과한 수고는 헛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지혜자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많습니다만 어리석은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매자보다 더 오래 살거나 더 누리지도 못하고, 천국에서 더 환영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생각하면 이 세상을 위하여 지혜롭게 산 사람이 더 어리석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참 지혜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유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들 앞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로 보나 명예로 보나 권력으로 보나 가난한 사람들은 그 가난이 한이 되어서 열심히 일하고 처세도 잘하여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고 칭송을 받기도 합니다.

자녀 교육에 투자도 많이 합니다. 제가 우리 애들 키울 때 강원도에서도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정선에 살았는데, 의외로 교육열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속셈학원 엄청 보냅니다. 그게 문화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원주에 오니까 열풍이 덜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서울에서는 원주를 시골로 보겠지만, 서울에서 성적이 중간 정도인 학생은 원주에 와서도 중간 밖에 못합니다. 서울권에서 이사 오신 분 있으시면 제 말에 공감이 갈 겁니다.

가난한 자들, 시골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 줄을 알기 때문에 나름대로 헤쳐 나갑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하고 칭송을 받기도 하지만, 기자는 역시 ‘~무슨 유익이 있는가(8절)’라고 반문합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환경에 발 빠르게 적응하고 입지전적인 인물로 칭송을 받아도 역시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만으로는 영혼의 만족을 느낄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소유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는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9절)’라고 말합니다. 어떤 원하는 것을 공상하고 있는 것보다는 그것을 소유하고 눈으로 보며 지내는 것이 백번 낫지만은 역시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람을 잡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저는 바람을 잡아 봤습니다. 잡아 봤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횡성군 갑천이라는 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데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적이 있습니다. 여름철 장마가 난 후 며칠 지나니까 강에 아주 풍부하고 맑은 물이 흘렀습니다. 동네 형들이 수영하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헤엄 칠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저는 형들과 떨어져 얕은 물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장마로 인해서 푹 패어진 곳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발이 푹 빠지는가 싶더니 둥둥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계속 떠내려갔어요.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리니까 물만 한 바가지 들어갔어요. 대번에 힘이 쭉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강둑에 심겨져 있는 버들강아지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강둑을 따라 버들강아지가 쭉 심겨져 있었는데, 그 나뭇가지가 강물을 향해서 죽죽 뻗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저 버들강아지 줄기만 잡으면 살겠구나!’ 생각하고 손을 힘차게 뻗었습니다. 몸이 둥실둥실 떠내려가면서 물속으로 들어갈 때는 가만히 있다가 몸이 물 바깥으로 떠오르는 순간 힘껏 손을 뻗쳐서 버들강아지 줄기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살았구나!’ 생각하는 순간, 몸이 다시 물속으로 쑥 들어갔습니다.

‘어 이상하다, 분명히 잡았었는데’. 또다시 틈을 노려 손을 쭉 뻗었습니다. 이번에는 버들강아지 줄기가 손 안에 잡히는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꽉 잡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살았구나!’ 생각하는 순간 다시 쑥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몇 번 반복되니까 숨을 쉴 수 없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제 눈에는 버들강아지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 거리는 몇 m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힘이 없어서 계속 떠내려가는데, 물속에서 하늘을 보니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습니다. ‘하늘이 참 파랗구나!’ 생각하며 축 가라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 몸이 잠수함이 물 밖으로 솟구치는 것처럼 솟구쳤습니다. 제가 떠내려가는 동안 동네 형이 죽기 살기로 헤엄쳐 와서 저를 번쩍 들어 올린 것입니다.

물속에서 제가 생명 줄로 여기고 버들강아지를 움켜주었는데, 제 손 안에 잡힌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분명 버들강아지 줄기를 잡았는데 잡힌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그 바람이 생명 줄인 줄 알고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지금까지 손목이 아파요. 그 생각만하면 손목이 다시 아파 옴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 줄인 줄 알고 힘차게 잡는 것, 저것만 잡으면 ‘행복 하겠구나’ 여기는 것, 사력을 다해 잡아 봤자 바람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내 수중에 놔두고 눈으로 보는 것이, 남의 수중에 있는 것을 갖고 싶어 하며 공상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래갑니까? 바람을 잡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입니다. 제가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버들강아지를 잡았구나!’, ‘살았구나!’라고 행복해 한 시간은 불과 0.1초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찰나의 행복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 줄인 줄 알고 힘차게 잡는 것, 행복 줄인 줄 알고 힘차게 잡는 것들도, 안 잡은 것보다야 낫겠지만 역시 0.1초에 불과한 찰나의 행복에 불과합니다. 7,80년의 인생이 긴 것 같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역사 속에서는 0.1초에 불과한 찰나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내 수중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격입니다.

 

 

사람이 평생 원하는 것을 위해 열심히 수고하지만 결국 바람을 잡는 것처럼 놓쳐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평생 물질을 벌기 위해서 수고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때로는 지혜롭게 살아서 만인의 칭송을 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의 인생 역시 아무 유익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우리 인생의 법칙은 이 세상에 한정된 법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영원한 세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을 통하여 그 영원한 나라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 이 세상만을 봅니다. 이 세상의 질서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돈을 벌고,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여 처세하고, 모든 것을 내 소유로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의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질서와는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질서와 맞지 않게 달리는 인생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다투어 이길 수 있습니까? 없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이름도 지어 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성향과 힘, 생각 등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다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무작정 열심히 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생 다음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생각하면서 일해야 합니다. 누구나 겪는 죽음 뒤에는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면 무작정 소유해야 한다는 의식은 사라질 것입니다.

 

인생 다음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그것은 곧 살인입니다. 미움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아니면 미움은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고, 상처는 절망으로 이어져 자살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미움은 살인의 시작입니다.

 

전도도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미움 당하지 않으면서 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분노를 사는 전도행위는 바른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전도한다면 한 명 전도할 때마다 백 명의 안티 기독교인이 생겨날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이 전도한 사람들은 교회 명부에 기록되고, 안티 기독교인들은 기록에 안 남아서 모를 뿐입니다. 몇 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잡음이 일어나면 그 열 배에 달하는 안티 기독교인이 발생합니다. 그런 것을 두고 잘했다 칭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뒤에 또 다른 우리의 본향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그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많은 말들, 많은 논리들을 쏟아내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낙이 무엇인지 알며, 장차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누가 가르쳐 주겠습니까? 아무도 없기 때문에 헛된 것입니다.

 

오직 교회 안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은혜 받은 것을 감사할 때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수고가, 사람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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