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한국)] 교회사(한국) 9. 일본에서의 이수정

관리자 승인 2020-04-14

 

 

 

       이수정의 일본 방문과 회심

 

 

(한국교회사-9. 일본에서의 이수정. 정리:이상호 목사, 발행인)  왕의 근친이요 친우였던 민영익과 교분이 두터웠던 이수정은 일찍부터 개화설(開化說)을 주장하다가 1882년 임오군란 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 국왕이 박영효를 정사로 김만식을 부사로 하여 수신사를 파송할 때 김옥균과 민영익을 밀사자격으로 동행시켰는데, 이수정은 이 두 사람의 수행원이었다.

이수정은 일본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었으나 특히 농업정책에 큰 관심이 있었다. 1882926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 사이도 없이 이틀 뒤에 농학자 쯔다센 박사를 접촉할 정도였다.

그런데 기독교인이었던 쯔다센은 이수정을 친절히 맞아주면서 한문성경 한 권을 건네주고, 시시때때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일들로 기독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된 이수정은 일행과 함께 귀국하지 아니하고 쯔다센 박사에게 농업기술을 전수받고 싶다는 이유를 대고 일본에 남았다. 그는 단기간에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고 그림도 상당한 수준인데다가, 그가 쓴 한문시는 일본의 주요 신문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츠키지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이 급성장한 이수정은 1883429일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미국 성서공회 소속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이수정의 소식을 본부에 알리면서 그가 은둔의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수정은 예수를 믿은 후 성품과 관심이 바뀌어 갔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열심과 동포에 대한 구원의 열정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일본에 유학중이던 동포유학생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성경공부반도 만들었다. 일본에서 자연스럽게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수정의 성경 번역과 한국선교 호소

 

이처럼 이수정이 조선 동포들에게 진리 전하기를 상당히 갈망하고 있을 때에 일본에 주재하던 헨리 루미스 선교사가 한글성경번역을 의뢰하자 주저함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수정의 번역에 대한 태도는 대단히 신중했다.

나는 사도들의 서간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글자 한 자라도 그것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 만족할 때까지는 결코 쓰지를 않습니다.”

루미스 선교사가 방문했을 때 그가 한 이 말을 통해 성경 번역에 대한 그의 애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영혼의 평안함이 그의 마음과 전인격을 지배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드디어 1884년 한문성경에 토를 단 현토성경인 신약성서 마가전이 출판되고, 1887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토를 붙인 한문성경은 유식자 층에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수정이 거의 동 시점에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해 신약 마가젼 복음셔언ᄒᆞ1천부를 발행했다. 바로 이 성경을 18854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갖고 조선 땅에 들어왔다. 두 선교사는 한국을 향해 오던 중 이수정에게 들러 2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갖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처럼 이수정의 역본은 로스 역본과 함께 한글성경 번역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수정은 일본에 있는 동안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서양문물이 아니라 민족을 복음화 시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일본에 주재하는 미국 선교사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선교를 호소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수정의 편지가 선교잡지인 미셔너리 리뷰에 실림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오윤태 목사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바로 이 편지를 읽고 한국선교에 뜻을 품고 태평양을 건너 왔다고 말하였다.

이수정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전도 문서를 많이 번역하여 한국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토대를 구축하였고, 미국에 한국선교를 촉구하여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수정의 귀국 그리고 말년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당시의 조선 정부는 외국 유학생들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이수정에게도 고위관리가 찾아와 데려가려고 했으나 이수정은 귀환을 거부했다. 그가 찾아온 동생까지 내친 것은 선교가 우리 민족을 위한 시급하고 큰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의 귀국은 다른 이유로 이루어졌다. 당시 갑신정변을 주도하다 실패하고 일본에 온 김옥균 때문이었다. 한 때 같은 개화파로서 어느 정도 김옥균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갑신정변 과정에서 자신과 친분이 두터웠던 민영익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인하여 더 이상 좋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런 와중에 김옥균이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선교를 호소하고 다니자 이수정 자신도 그와 한 배를 탄 것이라고 오해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는데, 결국 이수정은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수정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구 귀국하기로 결심하였다.

 

귀국 후의 이수정 신상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 교회문서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한국에 도착한 후 보수파에 붙잡혀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설과 국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일본에서 자객으로 인해 받은 상처 때문에 중병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수정은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불러 쓰신 거룩한 도구였다.

 

트위터로 공유하기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이 기사 공유하기
전체댓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