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박원규목사 로마서 설교(34) 누가 내 형제를 구원할까? (롬 9:1-5)

관리자 승인 2020-09-10

          
 

성경에는 구원의 진리를 가시적인 사건으로 보여주신 일이 많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받다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하여 구원받은 것이나, 홍수 심판 때에 노아가 방주로 인하여 구원받은 사실이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노아시대의 홍수를 보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악함을 보시고,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6:7)”고 말씀하셨다. 물론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으며, 심판은 120년 후에 실현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심판은 벌써 정해진 시간 안에서 다가오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최후 대심판을 앞둔 이 세대의 모든 이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짓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오늘날 누구인가? 그리고 방주가 완성돼 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일축해 버리는 사람들은 오늘날 누구인가? 이를 생각해 볼 때 이 사건은 오늘의 우리 형편을 잘 볼 수 있도록 기록된 신령한 거울이다.

그런데 방주가 완성되고 노아와 그 식구들과 모든 동물들 중에서 구별된 것들이 방주로 들어갈 때에 노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 이제 살았구나!”라고 환호성을 질렀을까? 아니다. 아마도 당시의 노아의 심정은 오늘 본문의 바울 사도의 심정과 다를 바 없으리라 믿는다.

즉 바울 사도가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이 구원받기를 구한 것처럼, 노아도 자신의 구원 받음에 대한 환호성보다는 심판을 모르고 잠자는 동족들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오늘날도 세상에는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벧전 3:20)”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울 사도가 그랬다.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많은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이 그분을 배척하고 있으니, 바울은 그 골육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내 형제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바울이 토로한 중심을 알아 보자.

 



1. 이스라엘을 위한 전도자의 탄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선민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 형제가 받은 놀라운 은혜와 헤아릴 수 없는 큰 축복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나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4-5)”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은혜에 감사하지 못했다.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대로 보내주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물론 바울 사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역시 그리스도를 박해하는데 선봉에 섰으며 스데반을 죽일 때 동참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로 완전히 변화되었으며,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의 형제 골육들은 아직도 예수를 배척하고 불신앙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바울의 심정이 오죽 답답하겠는가?

은혜를 알고도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는 것도 죄일진대, 한술 더 떠서 오히려 배척하고 복음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큰 근심과 고통으로 탄식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모르고 도리어 신령하고 거룩한 은혜를 욕되게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로 인해 노아 시대와 같이 탄식하신다. 이제 우리도 바울과 같이 깊게 탄식하며, 내 골육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힘쓰자.

 

2.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함이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매우 극단적인 언사를 동원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

물론 이 말을 그대로 받으면 모순된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형제 구원을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을 권한이나 자격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형제 구원을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는 말씀과도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 사도의 이 같은 언사를 통해 그가 남의 영혼 구원을 위해 그만큼 헌신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도 구원의 주권을 좌우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임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이런 극단적인 표현까지 쓰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최선을 다한 것에 도전을 받아야 한다. 이제 우리도 새로운 각성을 통하여 전도에 임하는 자세를 갖자.

 

3. 성령 안에서 진실한 전도자임을 증거한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위해 극단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9:1)”고 미리 선언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복음 사명에 불타고 있음은 자신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함께 고백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면 바울의 이와 같은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전도자로서의 자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조직이나 형식을 중요시하고 그 내용에 충실하지 못함을 왕왕 볼 수 있다. 예컨대 남전도회나 여전도회 등 조직은 많지만, 그 실상 전도는 뒷전이고 임원 조직이나 형식적인 헌신 예배 등 진실과 열매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야 한다. 그는 교회 역사상 세계 복음화의 기수라고 할 만큼 가장 훌륭한 전도자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진실한 전도자가 되어 어떤 기관이나 단체 속에서 스스로 속는 자가 되지 말고 착실하게 전도하는 자가 되자.

 

(맺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아야 함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나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면 그때 비로소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구원을 호소할 것이다.

바울이 알렉산드리아호를 타고 로마로 향하다가 그 배가 침몰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두 가지 유형의 구원을 전한다.

그 하나는 육신의 구원으로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27:31)” 한 것이요, 또 하나는 영적 구원으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7:24)”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육신의 구원은 영혼 구원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구원을 소망하듯이 더욱 영혼의 구원을 소망해야 한다. 아울러 내 영혼이 구원받듯이 내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며 안타까워하며 전도해야 한다. 구원의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세세토록 돌리자.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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