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박원규목사 로마서설교(38) 루하마와 암미라 하라(롬 9:25-33)

관리자 승인 2020-10-31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작정하신 것으로서 시대마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케 하셨고, 또한 그 예언대로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 구원은 값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무지한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을 말씀하셨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2:1)”

그런데 여기에서 암미라는 말은 내 백성이라는 뜻이고 루하마는 긍휼이라는 뜻이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심을 나타내는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넘치는 사랑인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그 뜻을 모르기 때문에 불평을 한다. ‘왜 우리는 실패하고 이방인은 구원을 받을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된 것이며, 그것을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알게 하셨다. 오늘 본문 (9:25-26)의 말씀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낸 호세아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 것인데,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아보자.

 

호세아의 예언

호세아 선지자의 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음란한 여인으로 나타난다. (1:2-9)을 보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말씀하셔서 호세아는 고멜을 취하게 된다. 여기에서 음란한 여인 고멜은 세상과 짝하여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데, 그들의 패역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의 첫아들을 이스르엘(아합의 왕가가 예후에게 멸망 당한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쫓아버리신다는 뜻)이라고 부르게 하셨고, 그다음에 낳은 딸은 로루하마(‘긍휼히 여기지 않겠다는 진노의 표현), 그다음의 아들은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라고 부르게 하셨다.

이 말씀은 음란한 여인이 음란한 자녀를 생산하듯이,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음행을 저지른 자들로서 그 이름대로 나라가 망할 것이며, 긍휼을 얻지 못할 것이며, 사생아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에 잊지 않았다. (2:14-23)을 읽어 보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음란한 여인 고멜을 위로하고 긍휼히 여겨 그 자녀들의 이름을 바꿔 부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로루하마를 루하마(긍휼), 로암미를 암미(내 백성)라고 바꿔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인용한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9:25)”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와 같다. 패역한 백성은 이미 내 백성이 아니지만, 내 백성으로 여기는 은혜를 베풀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방인인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이다. 우리는 본래 음란한 여인이요 그 자녀였으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2. 이사야의 예언

이사야 선지자는 (10:22)에서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라고 증거하는데, 이 말씀을 바울 사도가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남은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바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자들로서 확실히 구원받은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왕상 19)을 보자. 엘리야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였으나 이세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남은 자요,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버림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 남은 자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셨을 때 남은 자들을 포함한다. 노아 시대 대홍수 심판에서 누군들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뒤덮일 때 누가 빠져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방주에 남겨두시고 롯의 가족을 소돔에서 빠져나오게 하셨는데, 이들이 곧 남은 자이다. 오늘날 우리는 남은 자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 자들은 모두 남은 자들이다. 바로 이 남은 자들은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복 있는 백성들이다.

 

3. 바울의 증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그들 스스로 자랑하고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하는 교만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렇게 증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라고 반문하면서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3:29)”라고 강한 어법으로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교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만을 사랑하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모두 미워하시는 줄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다.

바로 이런 생각은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만이 하나님의 백성되었다고 자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아주 잘못된 편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의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혈통적 자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는 이면적 자손에게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크고 넓으신 사랑이요, 상상할 수 없는 뜨거운 아버지의 심정인 것이다.

예수께서 (15:11-32)에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가 바로 이방인 된 우리의 사랑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볼 때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자라 생각되지만, 그는 분명 아버지의 자녀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탕자가 세상에서 방황할 때도 사랑의 눈길을 멈추지 아니하시고, 아픈 심정으로 기다린 것이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올 때 풀 죽은 거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알기 때문에 어떤 대우도 바라지 아니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에게 뜨거운 사랑을 부어주셨다.

오늘 본문에서 암미와 루하마는 바로 너는 내 백성이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역설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오늘 이 순간도 탕자 같은 우리를 향해 변함없는 사랑의 눈길로 우리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신다.

 

(맺음) 고멜은 아주 먼 옛날의 음란한 여인이 아니라 바로 오늘 세상과 짝하여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그 여인은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대역자로 드라마에 출현하였다. 그는 음란한 여인으로서 음란한 자녀를 생산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을 베푸셨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쥐엄 열매라도 찾는 자리인가? 이제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가자. 탕자가 헐벗고 굶주릴 때에 번뜩 스치는 아버지의 품이 있었듯이, 이미 죽었던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자. 우리는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남은 자로서 측량 못 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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