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한국)] 교회사(한국) 1. 서양 최초의 귀화인 벨테브레(박연)

관리자 승인 2018-01-29

나가사키로 향하다 배 좌초

관원들에게 애걸복걸



1627년 慶尙道(경상도) 海邊(해변)​1)에 푸르른 눈과 누른 수염이 드리워진 흰 얼굴의 세 남자가 上陸(상륙)했다가 주민들에게 붙잡혔다.

 

네덜란드 국적의 얀 얀스 벨테브레, 디렉 헤리스베르쓰, 얀 피테르츠로 밝혀진 이들은 무역선인 우베르케르크 호를 타고 교역 차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물을 구하러 상륙했었다.

 

관원들이 주민들로부터 이들을 넘겨받은 시점은 해가 거반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관원들은 이들의 취조를 위해 횃불을 들고 다시 바닷가로 데리고 나아가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이들은 자신들을 태워 죽이려는 것으로 판단하였는지 눈물을 흘리며 애걸복걸하였다. 관원들은 안심하라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몸짓을 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시간이 좀 흐르고 관원들의 친절이 계속되자 눈물을 그쳤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취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동래부사 앞에 선 벨테브레(박연) 일행은 평온을 좀 되찾은 모습으로 구체적인 의사표시를 하기 시작했고, “야폰”과 “나가사키”를 외쳐댔다. 동래부사는 이들의 원래 목적지가 야폰의 나가사키임을 알아차리고 동래에 있던 倭館(왜관)​2)으로 보냈다.

 

倭館(왜관)에서도 언어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매일반이었다. 왜관 관계자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일본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도로 데려가라’고 하였다.

 

 

인조대왕, “훈련도감에 편입시키라!”
 

부산에 억류돼 있던 벨테브레 일행은 5년이 지나서야 서울로 압송되었다. 처음 인조대왕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긴장한 빛이 역력했지만, 이내 눈물을 쏟으며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벨테브레 일행의 계속되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인조대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 보지 그러냐!’라고 빈정대기까지 하였다.

 

‘이전에 유럽인들이 표류해 오면 중국을 통해서 송환했던 것처럼 송환하자’는 대신들의 의견도 나왔지만, 현재 ‘만주족인 청나라가 중국을 거의 장악하고 지속적인 위협을 해오고 있기 때문에 외교 통로가 원활하지 않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었다.

 

인조대왕은 심문 중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었다.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벨테브레가 무예를 선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병서에 능하고 대포나 화약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北伐(북벌)에 관심이 많아 신무기 제조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인조로서는 벨테브레를 활용하려고 했다. 인조대왕은 심문을 마친 후 벨테브레 일행을 ‘훈련도감에 편입시키고 전투에도 참여시키라’고 하였다. 벨테브레가 무슨 의도로 병법과 무기 제조법에 관한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 요원해졌다.
 

 

 

벨테브레, ‘박연’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다
 

벨테브레 일행은 훈련도감에서 대포 만드는 법과 조작법을 가르치고 화약을 개발하는 한편, 전시에는 직접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19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에 포함되어 청나라와의 전투에 출전했다. 결국 동료인 헤리스베르쓰와 얀 피테르츠는 전사하고 벨테브레만 살아남았다. 그는 이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왕으로부터 ‘박연’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 조선 여인과의 결혼이 허락되어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귀화인 벨테브레
 

벨테브레는 준수한 용모에 지식과 인격을 갖췄고 신무기를 다루는 기술까지 출중하여 구인후 훈련대장 휘하에서 군의 영솔자가 되었다. 그가 조선여인과 결혼하여 자녀까지 두었다는 것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귀화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애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벨테브레는 자신처럼 배의 난파로 표착하는 외국인들의 통역을 담당하는 통역관으로서 자신의 생애를 머나 먼 이국땅 조선에서 보냈다. 그는 조선에 입국한지 26년이 지난 1653년(효종 4년)에 통역관 자격으로 하멜을 만났다. 자신과 같은 동족인 네덜란드인 하멜은 벨테브레처럼 바다에서 표류하다 입국하여 제주 감영에 압송되어 있었다.

 

하멜의 표류기에 의하면 그때 벨테브레는 이미 고국 네덜란드의 언어를 많이 잊어버려 더듬거리는 상태였다고 한다. 기구한 만남으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으나 벨테브레는 조선 관리의 입장에서 하멜 일행을 안내하고 적절한 충고를 해주었다.

 

특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하멜에게 “조선은 들어온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다시 내보내지 않는다. 나가사키에 가도 죽는다. 잘 대해 줄 테니 여기 있어라”고 했다. 그는 하멜 일행에게 수년 간 조선의 풍속과 언어를 가르쳤다. 지금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에 위치한 De Rijp 마을에 있는 교회에는 Jan Janse Weltevree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여호와 이레’
 

우리는 벨테브레가 기독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당시 네덜란드는 개신교 국가로 세계의 개신교를 주도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벨테브레 역시 기독교인이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정재륜의 『한거만록』에 의하면 “벨테브레는 선악, 행복, 천재지변 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든지 ‘모든 것은 하늘이 알아서 보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당시 조선이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볼 때 벨테브레의 이러한 언어는 일반적인 종교적 심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의 기독교 신앙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선교사가 아니라 상인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삶 속에서 은연중에 신자로서의 언사가 들어나 주위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개신교 신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바다의 풍랑과 함께 그를 사용하신 것이다. 벨테브레는 훗날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을 통역관 자격으로 만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하멜은 『하멜의 표류기』를 통하여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그리고 이 당대의 베스트셀러를 읽은 기독신자들 중에서 ‘조선 선교’를 꿈꾸는 선교사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실로 하나님의 역사가 조용하고 차분한 준비 속에 깊은 곳에서 진행된 것이다.


1)벨테브레의 상륙지가 제주도로 기록된 곳도 있으나 박용규 교수의 『한국기독교사』의 기록을 인용하였다.

2)조선시대에 왜인과 통상하기 위해 동래 등에 두었던 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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