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고난 없는 영광을 찾습니다

관리자 승인 2018-03-25

고난 없는 영광을 찾습니다 <큰 빛 교회 유승관 목사>



                                                                                      
                                                                                       큰 빛 교회 유승관 목사
 

 

2018년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부활절과 연계되는 행사들에 대한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신자들이 평시에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로 지내다가 이 시기만 되면 법석을 떨기 때문이지요. 제 눈에는 이때 받은 약발로 일 년을 버티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이 보여 보기가 불편합니다. 또 하나는 신자들이 평시에는 고난 없는 영광을 찾다가 이때는 세상 고난은 혼자 다 지고 가는 사람처럼 유난을 떱니다. 이것도 마치 쇼를 하는 것 같아서 영 못 마땅하게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평소에는 가나안의 종교와 풍습과 삶의 방식을 따라 율법을 거역하며 삽니다. 그러다 절기 때가 되면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을 연상케 하여 이 절기가 심히 불편하기만 합니다.

 

성경은 신자의 고난은 필연이라고 합니다. 타락에 대한 심판과 신자들의 자범죄로 인해서, 신자들을 단련하시기 위한 주님의 계획 때문에, 소명 받은 사역을 감당할 때 대적들의 방해로, 신자들의 부주의와 실수로, 연약함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고난 없는 삶은 구원이 완성된 후에 가능하고 이 세상에 발 딛고 있는 한 누구나 예외 없이 고난을 겪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고난 중에 임하는 주님의 위로가 있고 궁극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잠시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는 그 영광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인내하면 그 가운데서도 즐거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주님은 신자들의 고난을 적절하게 사용하셔서 오히려 정금이 되게 하시므로 고난을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비하(卑下)는 이 땅에서 그의 삶이 고난으로 시작하여 고난과 더불어 사시다가 고난으로 마친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말구유에 누임은 세상의 가장 비천한 인생 보다 못한 상태의 출생입니다. 앞으로 전개 될 그의 생애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성장 과정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흙 수저의 신분에 맞는 낮은 자로 그의 때를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공생애 때에는 죄인으로 혹은 귀신의 졸개로 비난 받으시며 자기 백성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비참하게 낮아지시는 고통이었지요. 3일간 무덤에서 음부의 상태를 체험하시는 끔찍한 고난도 겪으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영광의 자리에서 찬양을 받으셔야할 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상상 할 수 없는 심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러한 고난의 삶으로 인해 성부의 뜻이 성취되고 자기 백성들이 영생을 얻을 것을 보시며 즐거이 헌신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 하도다”(히2:10b)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구주로 완전한 자격을 구비하시고 만왕의 왕의 자리로 높아지심은 그가 마셔야 할 잔을 다 마셨기 때문에 성부께서 그의 전부를 받으시고 온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으시지만 자원하여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성부께서 만족하실 만큼 구속의 사역을 이루어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부도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와 만왕의 통치자의 권세를 주시며 지극히 높여 주셨는데 이렇게 하시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의 창시자인 주께서 마땅히 겪어야 할 고난이 있었다면, 그 뒤를 쫓는 신자들도 소명을 따라 사는 과정에서 만날 고난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마셔야할 잔을 마셔야만 돌아올 영광을 기대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를 읽는 독자들이 당시 소수 인으로 인해 소외와 불이익과 박해를 당하는 고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니까 신앙이 서서히 약화되고 급기야는 배교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신자의 고난의 의미와 영광을 자세히 보여주며 이기도록 격려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도 고난 없는 영광은 없으니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상과 기업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권고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대는 고난 없는 영광을 얻고자하는 사고로 만연되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복을 받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그대로 되고, 안수만 받으면 만사가 해결되고, 기도만 하면 돈이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쉽고 편하게 재미있고 빠르게 하늘의 영광과 은사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너도나도 선전을 합니다. 사탄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거라고 쉬운 방법을 가르쳐주었지요. 그는 그대로 했는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탄은 예수그리스도에게도 나에게 절 한번만 하면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얻을 수 있다고 쉬운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주님은 달콤한 속임수라는 것을 아시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부께서 정하신 방법으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사탄은 예나지금이나 고난 없이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미혹하여 많은 신자들이 따라가는데 그 길은 필경 사망의 길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성부의 영광과 자기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하신 고난과 같은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도직을 변론할 때도 제일먼저 “모든 참음”(고후12:12)을 듭니다. 이것은 주의 사역으로 인해 오는 육체적인 피곤함과 외부로부터 오는 극심한 고난도 참아낸 것을 말합니다. 다른 것보다도 참 사도된 증거로 교회를 위해 모든 고난을 참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주님이 성육신의 삶을 사신 것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짜들은 자기 배만 위하기 때문에 고난이 오면 즉시 버리고 돌아섭니다. 그들이 사탄이 가르쳐주는 고난 없는 영광을 쫓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가장정확한 시금석은 “그리스도의 흔적”을 보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을 바라는 사람들이 고난주간을 지키는 것은 외식입니다. 기독교에서 고난 없는 영광을 찾는 것은 독이든 성배를 받는 것입니다. 주께서 성육신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듯이 하늘의 영광과 은사들은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잔을 마실 때 임하는 것입니다. 쉽고 편하게 재미있고 빠르게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사탄이 신자들을 넘어뜨릴 때 사용하는 달달한 멘트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참 신자냐? 아니면 나이롱 신자냐?는 주와 및 그의 영광을 위해 부득이하게 맞을 수밖에 없는 고난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쉽게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부름 받은 신자들은 그로인해 받을 수 있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 입니다. 이런 신자들에게 하늘의 영광과 각양 은사를 풍족하게 부어주시는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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