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한국)] 교회사(한국) 3.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

관리자 승인 2018-03-28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


마치 자기네 땅인 것처럼 ‘제임스 홀 군도’라고 명명

1666년 화란 인 하멜이 조선에서 탈출한지 150여년이 지난 후에 리라 호의 함장 바실 홀 대령과 알세스트호의 함장 맥스웰은 조선의 ‘서해안 해도 작성’의 임무를 띠고 출항하였다. 이는 동양에 대하여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영국정부의 조치였다.
바실 홀 일행이 북위 37도 50분, 동경 124도 50분에 위치한 소청도에 처음으로 배를 대자 조선 사람 대여섯 명이 조각배를 타고 노를 저어 왔다. 야만스러운 느낌이 드는 조선 사람들은 영국인들의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기도 하였지만, 가능한 빨리 자기네 땅에서 내쫓으려고 하였다. 맥스웰 함장은 이 섬들을 제임즈 홀 군도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에든버러 학술원 총재였던 바실 홀의 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뜻이었다.


목이 잘리게 될 것

바실 홀 일행은 계속해서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다 해안에 배를 댔다. 뜻하지 않은 침입자들을 보고 이미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일행을 따라다니며 ‘계속 걸어가면 목이 잘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세계 공통어 ‘술(酒)의 언어’ 사용

드디어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은 조선 본토 가까이에 닻을 내렸다. 수심이 9m 정도 되는 곳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소동했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칼과 투박한 외투로 무장을 한 조선의 늙은 수장이 일행의 함대로 찾아왔다. 그 수장은 마량진 첨사 조대복이었는데, 일행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매우 침착하고 엄숙하게 5분여 동안이나 연설을 했다. 바실 홀 일행도 영어로 화답 연설을 했지만 의사소통이 이루어질리 만무했다. 수장은 다시 종이에다 글을 써서 주었는데, 역시 일행이 이해하지 못하자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바실 홀 일행은 ‘술(酒)의 언어’ 사용해 보기로 했다. 수장에게는 ‘체리 브랜디’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럼주’를 나누어주어 조선 토박이들의 기분을 완전 좋게 하는데 성공했다. 배를 방문하는 토박이의 수가 점점 늘어가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곤 하였지만, 웬일인지 수장은 마음이 불편한 듯 했다.

마량진 첨사 조대복은 마을로 돌아와서 낯선 서양 함대의 출현을 기록하여 충청수사 이재홍에게 전달하였고, 이재홍은 이 사실을 조정에 올려 답신을 기다렸다.


육지에 상륙

이튿날 이른 시각, 되돌아갔던 조선의 늙은 수장인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 일행이 다시 배를 타고 나타났다. 조대복은 어제처럼 배 안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만지작거렸고 병색이 있는 이승렬은 군의관으로부터 진찰을 받았다.
맥스웰 일행은 조대복에게 ‘육지에 상륙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조대복은 안 된다는 표시로 머리를 가로 저었으나, 곧 마지못해 승낙한다는 표시로 맥스웰 함장의 보트에 올라탔다. 맥스웰 일행도 몇 명 올라탔다. 그러나 보트가 육지에 닿기도 전에 조대복은 자신이 상륙을 허가해 준 것을 후회했다.

조대복은 목이 잘리는 시늉을 연이어 하며 ‘안 된다’는 표시를 했지만, 일행은 못 들은 척 배를 저어 나갔다. 배가 육지에 닿자마자 영국 일행이 뛰어내리자 조대복은 절망감 속에 손을 치켜들고 슬픔에 잠긴 얼굴을 앞으로 숙였다. 눈물까지 흘리는 그를 보고 일행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수장 조대복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다가 한 병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마을로 들어갔다. 때로는 큰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통곡을 하면서 가는 수장의 모습에 맥스웰 일행도 안타까워했다.

아마도 조선에서는 이미 ‘이방인의 상륙에 대한 처리 방향’이 훈령으로 하달되어 발효 중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영국 일행에 대한 신속한 대응과 상륙에 대한 끈질긴 반대를 할 리 만무했다. 일행은 다시 보트에 올라타 함대로 돌아 왔다. 일행이 수장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호의가 그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늙은 수장 조대복의 처신

일행이 더 남방으로 떠나려고 할 때 조선의 수장 조대복이 다시 맥스웰 함장을 찾아 왔다. 그런데 통곡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쾌활함과 호기심도 사라졌으며, 차갑고 정중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수장은 어떤 선물도 받으려하지 않았으나 큰 성경책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것을 주려고 하자 마지못해 거절하는 것이 역력히 보였다. 그래서 배가 떠나기 직전 다시 건네주자 매우 고마워하며 성경책을 받았다.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은 그들이 밟았던 조선의 땅을 큰 아쉬움 없이 떠났다. 바람에 흩날리던 허연 수염과 성대한 의상의 기풍 있던 수장의 인상은 나중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로 말미암아 존경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별처럼 뿌려져 있는 섬들 그리고 까무잡잡한 사람들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은 며칠 동안 남방으로 향하며 바실 만을 비롯하여 섬들이 무수히 많은 바다를 빠져나갔다. 일행이 갖고 있는 海圖는 정확성이 매우 떨어졌으나 그럴수록 ‘서해안 탐사’의 목적을 부여받은 일행에게는 매우 높은 차원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밤중이나 조류가 빠를 때에는 항상 항해를 중지하는 등 자연 현상 하에서 매우 신중하게 행동했다.

일행이 섬에 정박하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까무잡잡한 아낙네들은 아이를 안거나 업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헐렁하고 앞이 트인 긴 치마와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햇빛을 피하기 위해 흰 수건을 쓰고 있었고, 어떤 여인은 상반신을 완전 노출한 채 절구로 쌀을 찧고 있었으며, 남자들은 지게로 나무를 나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일행이 떠나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려와 자연스러움의 차이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은 항해를 하면서 장교들보다는 일반 수병들이 조선인들과 더 잘 사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교들은 조선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호의를 얻으려고 배려하다보니 신중하게 행동을 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그들에게 불신과 불안감을 주는 것 같았다. 반면에 일반 수병들은 악의도 없는데다 깊은 생각 없이 홀가분한 태도로 대해 친밀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그러나 바실 홀은 그의 저서 『조선 항해기』에서 ‘조선인은 세계에서 가장 비사교적인 사람들이고 이방인들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라고 기록했다.


파직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은 충청수사 이재홍의 소고(訴告)로 인해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순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두 척 함선이 대양도 아니고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해 있었는데, 바람이 자고 물결이 낮아지기를 기다려 배와 인원을 많이 동원하면 어찌 끌어들일 방도가 없었으리요~ 이처럼 중대한 사건을 문정하는데 아무 빙거할 만한 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일찍 이런 일은 있어 본 일이 없다~ 그대로 둘 수 없어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은 먼저 관직을 파출하고 그 죄상을 지금에 품하는 바이다.”


바실 홀과 맥스웰의 서해안 탐사의 의의

조대복과 이승렬의 그 다음 행적은 알 수 없다. 그들이 성경을 받았지만 읽을 수 없는 영어 성경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그 영어 성경마저도 이재홍을 통해 서울로 송달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바실 홀이 돌아가서 저술한 『조선 항해기』는 하멜의 『표류기』 만큼이나 조선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공헌을 했다. 하멜이 조선을 처음 알렸다면, 바실 홀의 저술은 조선의 구체적인 위치와 항해 해도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종교 및 문화사적 견지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실 홀과 맥스웰이 작성한 해도는 조선의 선교에 새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기록한 책과 서해안 해도, 그리고 ‘한 권의 성경이 조선인들에게 건네졌다’는 사실이 선교사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그리고 16년 후인 1832년, 그 중 한 사람인 칼 귀츨라프 선교사 고대도에 일 개월 간 체류하면서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고대도의 주민들이 칼 귀츨라프 일행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맞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있었던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의 얘기들이 완충작용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영어성경이긴 하지만 한 권의 성경을 처음으로 조선인의 손에 쥐어 준 바실 홀과 맥스웰의 탐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트위터로 공유하기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이 기사 공유하기
전체댓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