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부활을 쫓는가? 정욕을 쫓는가?

관리자 승인 2018-03-31

부활을 쫓는가? 정욕을 쫓는가?

 

                                                                                                                            
                                                                                                                                        큰 빛 교회 유승관 목사

                                                                                        

성경의 사두개인은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계대결혼을 한 형제들이 부활을 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는지 어이없는 질문을 합니다(마22:23-33). 그들은 솔로몬 때에 제사장 반열에 오른 가문입니다(왕상2:35, 대상29:22). 이후로 포로귀환 때나, 주전 167년경 마카비혁명을 통해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을 때도 제사장 직무를 담당했습니다. 이들의 위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목표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상상이 안 되겠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이들이 부활과 내세를 부정하는 것은 유대의 핵심세력으로서 권력과 부와 명예와 기득권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윤리와 도덕만 제시하는 현세적인 종교가 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누구라도 세상을 탐닉하면 예외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통하여 아담에게 가르쳐주시고 선악과 명령을 순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사탄의 미혹에 빠져 실패하자 예수그리스도가 이 일을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위에서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중보의 제사와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안식의 나라의 문이 열렸습니다. 성부는 예수그리스도를 부활과 승귀(昇貴)의 신분으로 높여 구주와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를 믿는 사람은 그의 공로를 전가 받아 부활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창세 때 계획하셨던 안식에 들어가는데 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계21:1). 이곳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설명하려면 지면이 부족합니다. 설명한들 우리의 이해력으로 다 알아듣지 못해 상징으로 보여 주십니다. 이는 상상으로 헤아려보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곳의 영광과 아름다움의 정도가 측정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안식의 세계에 입성하는 통과 의례와 같은 “부활”을 신앙의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활신앙은 구약에서부터 시작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가나안보다 "더 나은 본향"을 염원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대망하다가 "이들 모두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고 합니다(히11:8-16). 이밖에도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비록 모호한 형태이긴 하지만 부활에 대한 희망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려고 했던 복음도 부활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고전15:3-4).” 이 시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최고 핵심 본질과 목표도 부활입니다.

 

부활은 신‧구약이 일관되게 최고 신앙의 핵심이며 목표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부활을 외면하고 현실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사두개 증후군 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으로서 처음에는 부활 신앙이 있었지만 어느 시점에서 정치와 종교의 핵심세력이 되면서 많은 기득권의 맛에 취해 그것을 수구하는데 몰두하다보니 점진적으로 신앙의 변질을 겪다가 부활을 부정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본질에서 인간적인 욕망으로 눈을 돌리면 서서히 신앙의 궁극적인 소망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얼마 전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부활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한 결과를 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32% 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교회의 연례행사 혹은 불신자를 전도하는 날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자가 부활신앙에 대하여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지요. 세상과 구별되려 하지 않고 동화되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현상이 만연된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율법의 가르침을 버리고 가나안의 종교와 풍습을 쫓아서 이방인과 같이 된 것과 같습니다. 신자들이 이와 같이 세상의 정욕에 빠지면 부활 신앙을 이탈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또 하나는, 이 시대 교회들이 성경을 수정하고 재해석하여 교회 관을 왜곡했기 때문입니다(오스기니스). 이머징 교회운동은 성경과 괴리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구도자 중심의 예배운동은 예배를 오락화 시키는 위험성을 계속 지적받고 있습니다. 또 일부는 문화와의 상관성을 연구하여 지나치게 문화에 의존하여 세속화를 부추깁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관용적 포용주의”입니다. 이로 인해 심각한 혼합주의 신앙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경향들은 기독교의 핵심 본질인 부활신앙을 밀어내고 현세적인 기독교로 전락 시킵니다. 현세적인 것은 현세에서만 약간의 유익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은 금생과 내세에 모두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선조들은 이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고, 환난을 극복하고, 대적을 이기고, 부활에 참여하고, 하늘의 기업을 상으로 받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개별적으로는 부활신앙을 지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현세적인 것들을 탐닉하므로 부활 신앙이 약해진 경향을 보입니다. 인류 최대의 난제이며 적은 “죽음” 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사망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통곡 합니다. 또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해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이 죽음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지만 해결 하지 못했어요. 아니 세상은 영원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인 죽음을 초월하는 것 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신약학자 제임스 던은 "부활 신앙은 결국 죽음으로 끝날 삶의 회복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한 삶으로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은 죽음을 초월하는 경이로운 기적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절대로 놓치면 안 됩니다.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3:10-16).”

 

이 본문은 바울사도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어떻게 살고 사역하는지 보여 주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힘쓰며 부활에 이르려고 합니다. 아직 다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일을 모두 뒤로 하고 부활을 향하여 마지막 순간 까지 달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신자들이 부활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현재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을 권고 하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에서 제일가는 파워 그룹이었습니다. 그 시대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진 최고의 갑의 신분이었지요. 그러나 정작 신앙의 백미(白眉)인 부활을 버렸으므로 다 잃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고 모든 영광을 다 안겨 주는 부활을 쫓을 것인가? 모든 것을 다 잃게 만드는 세상의 달콤함을 쫓을 것인가? 현명한 선택을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영원한 안식과 영광의 기업을 약속하는 부활을 바라보며 끝까지 달려가는 신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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