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비판과 갈등만 유발하는 비도덕적인 비판들

관리자 승인 2018-04-13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비판과

갈등만 유발하는 비도덕적인 비판들


                                                                                                                                              이상호 목사

                                                                                                                                        (원주인터넷신문 발행인)

 

인간이 만족스러운 수익 창출과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광범위하게 대중을 이끌고 선도하는 직업과 좁은 곳에서 깊이 있는 연구나 기술로 사회의 한 부분을 떠받드는 직업이 있다. 전자는 정치인이나 종교인, 경제인, 고급관료 등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자기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폭 넓은 인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도덕성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바람직한 행동 규범에 대한 품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딱히 위법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인 품성이다. 법이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거지를 통제하는 것이라면 도덕성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도덕적인 것과 비도덕적인 것을 구분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시대와 사회 속에서 리더십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리더들은 높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규칙과 명령으로만이 아니라 모범적인 삶이 동반돼야 사회나 조직을 잘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남의 비도덕적인 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더 비도덕적일 수 있다. 자기의 비도덕적인 것을 감추고 남의 그것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의 비도덕적인 것을 비도덕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을 더욱 비도덕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는 도덕성을 운운하되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나도 비도덕적인 면이 많지만 당신에게 이러이러한 비도덕적인 면이 보인다. 고치는 것이 어떨까?’라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자세는 비도덕적 존재인 인간이 좀 더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일이므로 비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비도덕을 비판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비도덕적인 사례들이 있다.

첫째는 ‘나는 깨끗한데 너는 더럽다’라는 식의 태도다. 이런 식의 태도는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는 고사하고 갈등을 부치기는 사회로 만들어 간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날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둘째는 위의 사례보다 더 심한 경우인데
‘동일한 종류의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의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예배 시간이나 등교 시간에 잦은 지각을 하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모르는 누군가가 찾아 와서 ‘지각이 잦은 제3자’를 비판하면, 덩달아 자기 자신도 맞장구를 치는 태도의 사람을 말한다. 자신은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셋째는 가장 심한 비도덕적인 사례인데
‘자신도 동일한 종류의 비도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다른 사람의 동일한 비도덕적인 결함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비판하는’ 경우이다.

한때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내고 지금도 서울의 모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모씨는 여러 번 친일파 후손들을 비판하고 친일 청산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교수의 조부 조강희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기자를 지내고 친일신문인 ‘동관신문’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 교수의 증조부 조병갑은 1890년대 고부 군수를 지내면서 농민들에게 무리한 세를 거두고 군민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돈을 수탈하였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를 세운답시고 비각세를 강제로 징수하고, 만석보를 축조한답시고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고 수세를 착복했던 사람이었다.

조병갑의 이와 같은 폭정은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고 이에 맞서 일본군이 들어와 청 일 전쟁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인간의 피 맛을 본 맹수들이 또 인간을 공격하는 것처럼’ 조선의 맛을 본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짓밟고 합방하는 수순을 밟게 했다.

자식이 부모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 교수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덜한 친일파 후손들로 태어난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한 것을 생각하면, 그 교수의 그런 행동은 정말 더 이상 비도덕적일 수 없을 만큼 비도덕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넷째는 가장 악질적인 비판인데, 다른 사람의 비도덕적인 일들을 업무적으로 강하게 비판하여 돈을 갖다 바치게 만들고, 그 돈으로 동일한 비도덕적인 일들을 벌이는 것이다.

어떤 시민운동가 출신 전 국회의원은 국회 청문회 장에서 기관장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민원부서에 소속돼 있는 특정인이 어떤 특정한 기관을 상대로 반복해서 강연 요청을 받고 강연을 해서 용돈 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 강연 요청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로비성인거지요.”

“지원을 받으려고 하는 기업과 그것을 심사하는 직업의 관계에서 이렇게 기업의 돈으로 출장 가서 자고 밥 먹고 체재비 지원 받는 것, 이것 정당합니까?”

“열흘에 4개국을 갔는데 공적으로 연수를 위해서 기관에서 소요한 시간이 딱 9시간입니다. 매년 1억씩 들여 가지고 해외연수라고 하면서 사실상 그냥 해외 관광 여행을 40명씩 보내고 있어요. 왜 이렇게 연구기관 분들은 스위스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코스가 거의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만 가고 있습니다.”

“권위와 신뢰가 무너지면 금융감독체계 전체가 무너지는 거지요. 물러나실 생각 없으세요? 참 부끄러움을 모르시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기관장들을 몰아세운 다음 그 기관의 돈으로 해외출장을 갔고, 자신이 소장으로 있던 연구소에서 고액강좌를 해 수억 원의 강연료를 받는 등 자신이 그토록 언성을 높여가며 비판했던 똑 같은 일들을 저질렀다. 역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안 물러나겠다고 버티고 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이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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