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박원규목사 로마서설교(42) 이스라엘에 호소하노라(롬 10:16-21)

관리자 승인 2021-12-25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15:11-32)를 통해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며 먼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다. 바로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자기중심의 생활에 깊이 빠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순종하려고 하지만, 그 마음이 조석으로 변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간다.

반면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신가? 탕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 그분은 집 나간 자식을 한 번도 잊지 않으시며, 그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여 문밖 멀리를 항상 바라보고 계신다. 그리고 자식이 돌아올 때 아직 먼 거리임에도 알아보시고, 달려나가 입을 맞추시고 새 옷을 입히시며,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온 이웃과 함께 즐거운 잔치를 열어주신다.

이 말씀은 온 인류가 함께 참여하는 천국 잔치, 곧 복음을 들고 믿는 자들이 구원받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날마다 짐을 지고 나가고, 날마다 자기 분깃을 원하며 스스로 살겠다고 버둥거리지만, 불현듯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 격인 이스라엘은 순종치 않았다. 그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큰 잔치를 열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을 보고 불평을 토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15:29-30)”라고 말이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맏아들의 말이 옳은 것 같다. 동정심도 생길 만한 일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그 정도의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작은 잣대로는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는 자신의 수고나 공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탕자는 돌아올 때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품꾼의 하나로라도 받아 주신다면 만족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께는 그가 도저히 알 수 없는 크고 깊으신 사랑으로 그를 다시 자녀 삼으시고 즐거운 잔치를 열어주신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의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맏아들 격인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천국 잔치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오늘 본문에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호소의 내용을 알아보자.

 


 

1. 이 기쁜 소식을 왜 외면하느냐?

성경은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10:18)”라고 증거한다. 그렇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 소식은 모든 백성에게 급속히 전해지고, 이 소식을 듣는 자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반면에 맏아들 이스라엘은 어떠한가? 유독 그들만이 복음을 거부하며 순종치 아니하기에, ‘이 기쁜 소식을 왜 외면하느냐?’고 호소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연 것은 구원의 복음이다. 이 구원의 복음은 자기의 선행이나 어떤 공적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늘 구원의 잔치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기쁜 소식을 듣고 속히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2. 너희를 위해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어린아이가 울거나 투정부릴 때 어머니는 사랑의 손을 벌려 안아 주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10:21)”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주님의 손에는 용서의 피가 묻어 있고, 우리의 허물로 인해 못 박히신 못 자국의 상처가 있다. 바로 이 손은 집 나간 탕자가 조건 없이 돌아올 때 맞아주실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다. 많은 이방인들이 이 구원의 소식을 듣고 조건 없이 돌아와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아직도 유대인들은 조상 자랑이나 하고 율법 자랑이나 하며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다. 바로 그들을 향해 주님의 피 묻고 상처받은 손은 종일 벌려져 있으시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위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호소이다.

 

3. 죽었다가 다시 산 자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자

사람들은 자신이 남에게 입은 은혜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남에게 베푼 것만 기억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다.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지 못했다.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반면에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멸시했다. 그런데 실상 하나님의 나라에는 세리와 창기들 그리고 이방의 개같이 천한 자들이 모두 와서 즐거운 잔치를 하고, 아버지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신다는 말씀을 들으니 맏아들로서 시기심이 난 것이다.

바로 이런 시기심은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무서운 병이다. 아버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탕자 곧 이방인의 즐거운 잔치에 이스라엘이 함께 참여하여 즐기자고 호소하신다.

 

(맺음) 우리는 늘 배우고 믿음을 고백하기도 하지만, 맏아들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기를 잘하는 자들이다. 곧잘 교회의 직분자로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10:17). 즉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믿으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선행과 공적을 들먹이지 말고,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에 감사해서 남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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