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한국)] 교회사(한국) 4. 칼 귀츨라프

관리자 승인 2018-04-21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를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  
      
칼 귀츨라프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한 첫 서구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

 

박연(벨테브레)과 하멜은 일본과 무역을 하다가 뜻하지 않게 조선에 입국하여 한국 개신교 시작에 작은 씨앗이 된 반면, 맥스웰과 바실 홀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입국하였다가 성경을 전래시킨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한국 선교의 여건이 하나하나 만들어 지다가 드디어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측면에서 지원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칼 귀츨라프(1803-1851)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엄스 선교사 등은 당시 부흥했던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으로 선교열이 가속화 되어갈 때 그 영적인 생명력으로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이다.

 

19세기 중반 유럽과 북미 강대국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근대화의 열기를 타고 제국주의 정책이 붐을 일으키며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교회는 경건주의 운동과 부흥운동으로 선교를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식민지 확보와 선교, 지극히 상반되는 본질을 가진 이 두 가지 일들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는 하나의 목적아래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국가는 선교사들을 앞세워 자신들의 의도를 선하게 포장하고 길 안내를 하게 했으며, 선교사들은 자국의 힘을 이용하여 포교를 극대화 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지역과는 달리 한국선교는 비교적 순수한 목적으로 복음이 전래 되었다.

 

 

칼 귀츨라프의 선교 준비

 

1803년 독일 피리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유태인 귀츨라프는 어려서부터 학업의 열정이 대단했고 선교사의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가지 못하고 한 마구 제조자의 도제로 보내져서 일을 했다. 선교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던 그는 18세 되던 해 프러시아의 황제에게 자신의 비전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경건주의의 중심지인 할레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고, 졸업 후에는 베를린에 있는 선교사 양성소에서 국비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이후 목사 안수를 받은 귀츨라프는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을 만나 중국선교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그는 1827년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은 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당시 지명 바타비아)와 태국의 방콕 등지에서 선교를 하였고, 1831년 런던 선교회로 적을 옮겨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중국 선교에 뛰어들었다.

 

칼 귀츨라프는 중국과 방콕, 류큐 섬, 그리고 한국의 서해안을 세 차례나 항해했다. 이와 같은 선교여행을 통해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깨달은 귀츨라프는 한국 선교를 위한 한국 방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된다. 때마침 영국의 동인도회사 로드 암허스트 무역선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되어 한국의 땅에 상륙할 수 있었다.

 

 

칼 귀츨라프의 입국과 선교 활동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준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마카오에서 출발해 산동 해안을 돌아온 칼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17일 황해도의 장산곶 근해에 상륙했다. 그는 강한 바람 속에서도 자비로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보호받아 온 것을 진실로 감사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해안에서 한 작은 조각배의 어부를 만난 그는 한문으로 소통하면서 몇 권의 복음서를 주었고, 섬 주민들과도 소통했다. 섬 주민들은 일행에게 담배를 주기도 하고 나라와 나이를 묻기도 하며, 자기네 나라의 왕의 위엄을 각인시키려고 하였다. 어디서든지 우리를 만난 조선인들은 인정에 넘치고 은혜를 베풀었다.

 

장산곶 근해를 떠나 남쪽으로 항해하던 칼 귀츨라프 일행은 7월 23일 안면도 근해의 한 섬에 도착했다. 그날 어부 몇 사람이 와서 물고기와 막걸리를 대접했고, 지금 배가 정박한 곳은 매우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강경이라는 항만으로 가라는 조언을 들었다.

 

7월 25일에는 충청도 홍주만 앞 고대도에 도착해 그곳 고관들과 만난 칼 귀츨라프 일행은 그들에게 성경과 서신, 그리고 선물을 주면서 왕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 린세이 선장이 “이 헌상품들을 받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정중하게 요청하자 관리가 그것을 받은 것이다. 조선의 관리들도 생마늘과 술을 건네주고 위탁 받은 물품을 조속히 국왕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칼 귀츨라프의 일기에는 “나는 갑판 위로 찾아 온 사람들이 성서를 즐겁게 받는 것을 보고 매우 만족하며 기뻐했다. 나는 이 나라 최고 통치자(왕)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유익 얻기를 갈망했다. 그가 죄인들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들보다 더 위대한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교리들을 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으로 인해 매우 기뻤다.”

 

이 첫 개신교 선교사는 그 당시 한국의 천주교와는 달리 처음부터 복음 전파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인들은 ‘예수가 곧 그들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반복해 듣고서도 도무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칼 귀츨라프는 실망하지 않고 조선에 심어질 진리의 빛을 보았다.

그의 일기를 보면 “나는 받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전도문서들과 복음서를 공급해 주었으나, 그 후 관리들에 의해 ‘무엇이든지 받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금지령으로 책의 가치가 높아졌으며 그것을 읽고자 하는 조선인들의 열성이 더욱 증가했다고 확신한다.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조선에 심겨진 하나님의 진리는 소멸하지 않고 주님께서 역사하신 때에 일정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정치적인 장벽들을 제거하시고 우리가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칼 귀츨라프 일행은 조선 왕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포도 재배법과 포도에서 술을 얻는 방법, 그리고 감자를 나누어주며 파종법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의 마음이 열려 그 심령 속에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자리 잡게 되었고, 훗날 감자가 충청도를 중심으로 소중한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나님은 칼 귀츨라프에게 진지하게 복음 전할 기회를 주셨다. 마량진에서 조선의 관리들이 칼 귀츨라프가 탄 배를 시찰하고 입국 목적을 캐묻기 위해 승선했다가 일기불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함께 밤을 지내게 된 것이다. 칼 귀츨라프는 승선한 홍주목사 이민희의 서생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적어주고 그 옆에 한글로 토를 달게 하는 방식으로 주기도문을 번역하였다.

 

그런데 조선 왕의 회신을 기다린 지 한 달이 지나서 흥분한 상태로 한 노인이 찾아왔다. 그 노인은 ‘받아 갔던 서한과 선물’을 되돌려주며 “그 선물을 받고 왕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한 일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틀 뒤 조정의 호조판서가 보낸 관리가 찾아와 ‘不可’라는 공식적인 회답을 주었다. 이 관리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므로 중국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결코 외국과 교류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왕에게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 관리가 “불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왕에게 당신의 문제를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모두를 당신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오”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귀츨라프 일행은 한 번 준 것은 되돌려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받지 않았다.

 

결국 칼 귀츨라프 일행은 조선으로부터 어렵사리 양식을 공급받은 후 ‘차후 영국 선박이 이곳에 오면 양식을 공급해 줄 것’, ‘난파당하는 배가 있으면 북경으로 되돌려 보내줄 것’ 등을 부탁하고 섬을 떠났다. 석별의 정도 나누지 못했지만 언젠가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것을 확신하면서, 더 좋은 때가 한국에 임할 것임을 희망했다.

 

칼 귀츨라프의 이 소망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 선교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져갔다. 그는 1834년 중국주재 영국대사관의 서기로 임명 받았고, 마지막에는 무역 감독으로 임명을 받았다. 중국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칼 귀츨라프는 영국과 중국 사이의 아편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의 저서로는 『중국사 개관』, 『칼 귀츨라프 항해기』, 『중국 개항』 등이 있고, 정기 간행물로 『이스턴 앤 웨스턴 이그재미너』와 『차이니스 리파지토리』 등을 간행했다. 

         
                       <칼 귀츨라프>                                                                        < 고대도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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