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한국)] 교회사(한국) 5. 영미(컬링), 마늘만이 아닌 자랑스러운 교회의 역사 의성

관리자 승인 2018-04-27

           

 

 

영미(컬링), 마늘만이 아닌 자랑스러운 교회의 역사 의성: 1832년 칼 귀츨라프가 서해안 고대도에 상륙하여 복음을 전한지 68년이 되는 1900, 경북 의성에도 교회가 들어 섰다. 의성 비봉마을에 살던 김수영이라고 하는 사람이 청도 장터에 갔다가 어떤 전도사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것이다. 김수영은 곧바로 미국에서 파송 받은 베어드(한국명 배위량1862~1931)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돌아와 마을 주민과 예배를 드림으로서 비봉교회가 시작되었다.

 

이어 1903년 비봉교회를 섬기던 한 아가씨가 옥산면으로 시집을 간 후 시댁에서 예배를 드리다 실업교회가 세워졌고, 의성 읍내에 살던 사람이 비봉 마을에 있는 처가를 왕래하다 복음을 접하여 1908년 읍내에 의성교회를 세워지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의성의 여러 교회들은 신앙을 토대로 사회에서 모범을 보였다. 비봉교회는 설립 직후 계신학교를 개교했고, 1920년대에는 의성교회가 숭신 유치원을 개원하는 등 지역 계몽과 발전을 선도해 나갔다.

 

1919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 역시 경북지역에서는 의성교회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930년대 말 기독청년들이 농촌 계몽운동에 나섰다가 탄압 받은 농우회 사건도 의성이 중심이었다. 농우회사건은 일제가 신사참배를 반대해 온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1897~1944) 목사를 의도적으로 연루시켜 체포해 7개월 간 의성 경찰서에 가두는 빌미로 사용하였다. 이 옛 의성 경찰서는 건물은 20183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역사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이런 역사로 인하여 교회의 행사는 곧 마을의 행사로 여겨진다. 교인이 아니더라도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헌금을 하는 일이 많으며, 새벽기도 종소리는 신자들은 교회로, 비신자들은 일터로나가게 하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비록 우리나라 모든 농촌마을에서 볼 수 있는 고령화 현상을 피해가지 못하여 재정적인 어려움도 많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 주일학교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의성교회에 세워진 100주년 기념비에는 오직 예수가 새겨져 있다. 비봉교회 설립 100주년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돋는 해 지는 달 세월이 흘러 춘풍추우(春風秋雨) 어언 100. 여기 높이 기념비를 세워 제막하니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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