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박원규 목사 로마서 설교(4) 내가 빚진 자라

관리자 승인 2018-05-11

내가 빚진 자라 (1:8-15)

 

성경에는 부채이라는 말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보면 를 아예 부채 곧 ‘dept’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14)”고 고백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빚을 지면 당연히 갚아야 할 의무가 있듯이, 죄를 지면 당연히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천국 비유(18:23-3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을 때, 그 탕감 받은 종도 당연히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신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임금의 사랑과 용서로 탕감 받았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그는 대신 사랑과 용서의 빚을 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탕감 받은 자도 당연히 사랑과 용서가 있어야 했지만, 그는 빚진 자로서 채주의 종이(22:7)이 되지 아니하고 자유 하였기에 옥졸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큰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한다. 그도 역시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다 도말해 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셨기에, 그 자신이 사랑과 용서의 빚을 진 것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채주되시는 주께서는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 탕감해 주신 사유를 말씀해 주셨기에, 그는 아직 복음을 듣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빚진 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빚이 복음이라고 하는 비밀의 그릇 속에 담겨져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빚과 무한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받은 자는 이미 빚진 자로서 온 천하의 어느 민족 어느 계층이든지 간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울의 이 같은 선언은 그 당시 유대인의 독점물로 여겨지던 복음이 로마는 물론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세계 선교의 선언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빚을 갚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나님 사랑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18:24)의 비유처럼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이다. 이 빚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절망의 빚이다. 그런데 성경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셨음이 짙게 배어난다. 즉 우리의 임금 되시는 예수께서 이 빚을 다 탕감해 주시고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일생동안 하나님 사랑의 노예가 되어 그 사랑을 찬양하고 전파하며 매여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노예의 행복이 그 주인의 사랑 안에 있을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채주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18:33)”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또한 이웃들이 나에게 진 아주 작은 실수들을 용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길이다.

 

2. 남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 그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 빚진 자가 참아달라고 하는 데도 목을 붙잡고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대노하여 그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를 옥에 가두고 다시 빚을 갚으라고 하셨다(18:23-35).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귀한 메시지를 전해 준다.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중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교훈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많은 죄를 용서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것에 비해서 이웃들이 우리에게 범한 죄는 너무나도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하여 주는 것은 선심이 아니요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그리고 용서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치를 따지지 않고 용서할 때 이웃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의 죄도 하나님께서 이치를 따지지 않고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치를 따지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용서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마음이 예수님의 그 너그러운 마음을 품은 것인 줄 알고, 이 빚을 갚는 생활을 해야 한다.

 

3. 영생을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를 전해야 한다.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심히 원했던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자 함이었다(1:11)고 말한다. 즉 영원한 생명을 로마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 영원한 생명이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라고 증거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것이라는 것을 이웃들에게 알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선지자 요나처럼 우리의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의 멸망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4:10-11)”라고 책망하신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회개하여 영생 얻기를 바라신다.

 

(맺음) 바울 사도가 내가 빚진 자라고 선언한 이 고백은 곧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먼저 받은 자들로서 그 빚을 안고 평안한 삶을 누린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죽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복음을 깊이 깨달을 때 그 속에 담겨진 사랑과 용서와 생명의 소식을 모든 계층 모든 민족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사랑의 노예가 되어 남을 용서하고 영생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진 빚을 갚는 것이다. 복음의 빚을 갚자.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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