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한국)] 교회사(한국) 7- 알렉산더 윌리엄슨

관리자 승인 2018-06-19

알렉산더 윌리엄슨(한국교회사 7):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세상을 떠난 1866년을 전후해 고려문에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조선선교를 준비하는 이가 있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로서 산동반도 책임자가 되었으며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고 후원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1829-1890)이었다.   

                                
  

토마스 목사가 순교 당한 후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져 기회만 있으면 토마스 목사의 유지를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때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가장 심하던 때였으므로 직접 한국에 와서 전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토마스 목사 순교 1주년이 되는 186799일에 조선인의 내왕이 잦은 고려문에 가서 한국인을 접촉할 기회를 얻으려고 했다. 당시 그가 복음을 전하던 요녕성 단동 봉성시 변문진에 있던 고려문은 유일하게 조선과 통하는 변문(청나라 초기 황태극이 1637년부터 1681년에 걸쳐서 1300km에 달하는 긴 울타리를 치고 20곳에만 문을 설치하여 출입을 하게 했던 곳)이었고, 봄과 가을에 장이 설 때는 조선인들도 자유롭게 들어가 물건을 매매하는 것이 허용되던 곳이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고려문에서 한국인들에게 중국어 성경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다.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성경을 반포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는 한국인의 지성과 성품과 윤리적 생활이 우수한 점, 그리고 명민한 판단과 큰 결단력을 갖춘 점,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수운의 편리함을 말하면서 다만 이 나라에 없는 것은 서양의 종교와 그 문명이라고 했다.

이처럼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누구 못지않게 조선에 대한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있었지만, 선교방법론에 있어서는 칼 귀츨라프나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처럼 제국주의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복음의 열정이 제국주의 패권의식으로 채색되어 복음의 순수성이 희석되었던 것이다.

 

특히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조선을 개방하도록 만드는 것을 일종의 거룩한 소명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는 대영 제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이 한국과 같이 폐쇄되어 있는 나라들을 개방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요 특권이라고 믿는다고 서슴지 않고 제안했으며 전쟁이라는 것이 비록 악이기는 하지만 진실한 문명의 불빛에 완전히 접촉하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은 결국 선의 상쇄로 끝날 것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복음 본래의 순수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이점이 후대 한국선교를 위해 중요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하여 1870한국에 관한 몇 가지 설명을 곁들인 북중국, 만주, 동몽고 여행기라는 책을 저술한 일이다. 이 책은 한국을 서구사회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몇 안 되는 서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 교회사

1. 서양 최초의 귀화인 벨테브레(박연)

2. 하멜과 표류기

3.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

4. 칼 귀츨라프

5. 자랑스런 의성교회

6. 제너럴셔먼호와 로버트 토머스

7. 알렉산더 윌리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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