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 박원규목사 로마서 설교(10) 율법 없는 자와 율법 있는 자 (롬 2:12-16)

관리자 승인 2018-08-04

박원규목사 로마서 설교(10) 율법 없는 자와 율법 있는 자(롬 2:12-16):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신속히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여자를 유혹한 뱀을 저주하실 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뱀을 향한 영원한 저주인 동시에 우리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된다.

왜냐하면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원수가 되고 마침내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승리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단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3:15)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실 때 이미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으로서 이를 원시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3:21). 그런데 이 가죽옷이라는 것이 짐승의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볼 때,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죄인들에 대한 긍휼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반면에 율법은 언제 나타난 것이며 그 역할은 무엇인가? 율법은 언약 이후에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3:17)”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후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출애굽 했을 때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에게 구원의 의나 방편이 될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만약 율법이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 된다면 모세 이전 시대에 살 던 사람은 하나도 구원받지 못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 이전에 살던 사람인 아벨이나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11).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있으나마나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상당한 역할이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때 율법은 유대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죄 아래에 있어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1) 유대인이 율법을 들었다고 해서 의인이 될 수 없고, (2) 이방인이 본성 곧 양심으로 인하여 의인이 될 수 없으며, (3) 율법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 됨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자.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지키게 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3:20). 따라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먼저 받은 자로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그릇 된 인식이다.

그런데 율법이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만약 율법이 없다면 인간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4:15)”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밝은 빛이요, 그것을 깨달은 자들은 복음이라는 구원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선민의식과 율법이 있다는 것만으로 남을 비판하고 자신들은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처럼 불신세계를 향하여 돌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2:13)

 

2. 자신의 죄를 깨달은 자는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찾게 된다.

인간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율법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구원에 이르는 방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이 아닌 다른 의를 찾게 되는데,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바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복음이다(3:21). 이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다(3:22).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 것뿐이다.

 

3. 인간의 양심이라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

오늘 본문 (2:14-15)을 보면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증거 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이 양심을 따라 행하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러면 무슨 뜻일까?

우리는 이미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러면 율법 없는 이방인은 옳고 그름의 판단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늘 본문의 기록에서 보여주듯이 율법 없는 이방인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이 옳은 가? 틀린 가자문자답하며 그 양심의 판단을 스스로 법으로 여기며 그대로 행동하게 된다. 이방인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른 판단기준을 그 자신 스스로에게 법으로 여기며 행동한다는 뜻인데, (물론 하나님의 율법과 그 양심의 기준이 일치한다든가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율법으로는 의에 이르지 못한다 하였으니 양심을 법으로 여겨 지킨다 할지라도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부분적인 해석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좋지만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큰 맥을 짚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야만이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로마서의 핵심 사상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7)”는 말씀이다. 사람의 양심이 율법을 대신할 수 없고, 설사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율법 자체가 구원의 방편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율법 안에 있는 자나 양심으로 사는 자나 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들이다.

 

(맺음) 율법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 없는 이방인이나 모두 저주 아래에 있는 죄인들이다. 율법은 구원의 복음이 선포된 이후에 주어진 것으로서 결코 구원의 방편은 될 수 없다. 다만 구원을 받은 자들이 그 안에 살며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잘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의 마침이 되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것을 알고 나아가야 한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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