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한국)] 교회사(한국) 8. 존 로스의 한국선교

관리자 승인 2018-09-15

(한국교회사 8- 존 로스의 한국선교. 정리: 이상호 목사, 발행인)한국 선교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큰 역할을 감당했다. 중국 선교의 개척자들은 대부분 영국과 스코틀랜드 출신들이었는데 존 로스 역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출신이었다.

           

1872년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존 로스는 아내 스튜어트와 함께 중국 만주의 우장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1873년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던 로스는 영국에 있던 누이동생 캐더린 로스에게 도움을 요청, 중국으로 건너오게 하여 자신의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 선교사 존 맥킨타이어는 청혼하여 둘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가 처남매부지간이 된 것이다.
                                                                                                                                               
존 로스는 누이동생 캐더린 로스에게 아이를 맡기고
1873년 가을 산동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다니며 선교열정을 불태웠다. 봉천 홍경을 거쳐 압록강 상류 임강 부근까지 건너간 존 로스는 거기서 우연히 한인촌 하나를 발견했다.

이미 토마스 선교사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로스였지만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강을 건너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외국인과 접촉만 하여도 처형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를 태워주려는 뱃사공을 구할 수 없었다.

 

존 로스는 한국에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면서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으니, 귀로에 만난 한인에게 한문 성서 몇 권을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수년이 지난 후에 몇 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할렐루야!

 

계속해서 한국을 두드리고 있던 로스는 한국어 선생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청 양국의 유일한 관문으로서 일 년에 네 차례 시장을 열었던 고려문을 방문했다. 존 로스가 어학 선생을 찾으려고 한 것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본격적으로 한국선교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호기심으로 로스의 설교를 들어 주면서도 복음보다 로스가 입은 옷가지에 더 관심이 많았던 한국인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의주 출신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이응찬은 한약재를 잔뜩 싣고 고려문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 배가 전복되어 모든 물건을 강에 수장시키는 바람에 무일푼의 처지가 되었다. 그는 로스 선교사의 한국어 선생이 되기로 작정하고 로스를 찾아왔다. 이응찬은 로스에게 자신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로스를 따랐다.

만약 자기가 서양인과 같이 일하러 갔다는 것이 관청에라도 알려지면 자신의 일가친척은 모두 감옥신세를 지게 되고, 그중 가장 우두머리 되는 사람은 목이 달아나게 되기 때문이었다.

 

한학에 뛰어난 이응찬의 지도를 받으면서 로스의 어학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를 이루었다.

폭풍으로 배가 전복되어 재산을 잃어버린 돌발적인 상황이 마침내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한국민에게 주는 결과를 맺게 한 것이다.

이응찬으로부터 한국어를 교육받던 존 로스에게 매우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존 로스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점점 증가하던 이응찬이 의주 청년들인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포섭해 데려온 것이다.

존 로스는 이 네 사람을 데리고 성경 번역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인 말씀만이 전도의 중심이라고 보고, 성경 번역에 진력해야 한다는 고귀한 생각을 품었던 복음주의자였다.

 

이응찬을 비롯한 네명의 청년들은 이 일을 위해 한문성경을 수차례 정독해야만 했고, 이 과정 속에서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마음이 열리게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복음전파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4년 후 이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이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은데 이어 서상륜과 김청송이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존 로스의 동료 선교사 맥킨타이어의 말을 빌리면 적어도 1879년 이전부터 한국인의 신앙공동체가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신앙공동체에 한국인들이 지도자로 직접 참여하여 선교사들을 도움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한국선교의 비전을 불태우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로스 역 성경은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성경번역은 18795월 존 로스가 안식년을 떠날 때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 원고를 지니고 갈 수 있었다. 그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에 관한 문화, 종교, 지리, 풍습을 담은 한국의 역사, 고대와 근대라는 책을 출판해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1880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3천 권에 대한 인쇄비와 두 선교사의 번역 비용, 그리고 한국인 번역자들의 급료를 지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돌아온 존 로스는 맥킨타이어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다시 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완성했다.

 

1881년에는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예수셩교문답예수셩교요령을 인쇄했고, 18823월에는 최초의 순한글 성경인 예수셩교누가복음뎨자ᄒᆞᅟᅵᆼ , 5월에는 예수셩교요안ᄂᆞ복음을 발행했다. 번역은 한국인들이 일단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놓으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해 가면서 수정하고, 그 이후 헬라어 성경사전과 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다시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며 마지막 수정 작업을 거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로스 역 성경들은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그 외 지역에서 사용하는 데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순한글 번역이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

한편 성경번역에 기여한 한국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교회사

1. 서양 최초의 귀화인 벨테브레(박연)

2. 하멜과 표류기

3.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

4. 칼 귀츨라프

5. 자랑스런 의성교회

6. 제너럴셔먼호와 로버트 토머스

7. 알렉산더 윌리엄슨

8. 존 로스의 한국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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